순일선원/순일스님저서

삼매 - 제4장 의식과 무의식의 특성-3

순일자재 2013. 1. 25. 23:49


 

(그림)

 
 
 
그림 (2)는 (1)과 둘이 있을 때만 객관이다.<비교할 상대가 있어야 객관이 됨> 그림 (2)가 (3)과 함께하면 이제 주관<어느 것과 비교하느냐에 따라 길게도 되고 짧게도 됨>이 된다. 객관이란 덜 주관적일 뿐인 주관인 것이다. 위의 줄들은 전체가 아닌 모두 “부분”들이다. 모든 부분은 아무리 길다 하여도 절대일 수 없으며 상대적일 뿐이다. 그러므로 주관과 객관은 현상에서의 쓰임일 뿐이다. 
 
헌데 이러한 쓰임을 우리는 종종 신념화를 거쳐서 진리로 받아들인다. 그러할 때 단견(斷見)이 되며 시시비비가 벌어진다. 신념이나 주의가 사람보다 우선한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참 행복을 위한 쓰임이며 도구일 뿐이다. 
 

즉 반쪽짜리 짧은 견해에 마음이 머무르지 아니 하는 것이 바로 중도(中道)이다. 모든 견해를 버리면 아무것도 아니한다가 아니다. 양쪽 모두를 알고 버리면 시시비비(是是非非)가 없으며 아무 생각없이, 그 배경과 상황에 맞게끔 절로 어느 쪽이건 견해 없이 쓰여 지게 된다. 
 

식당엘 간적이 있었다. 어항에 물고기들이 살고 있었다. “저 물고기들 여기서 평생을 갇혀 사니 참 불쌍하구나.” 하고 이야기 하자, 어떤 이는 그러한 단견을 짓지 마시라고 이야기 하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저 물고기들이 지금 강에 살고 있다면 큰물고기들에게 아니 잡아먹히려고 도망 다니느라 더 힘이 들 것이다”고 이야기 하였다.

 
삶에 어떠한 사건에 부딪힐 때마다 스스로 생각하는 견해와 반대되는 견해에도 합당한 이치가 있는지 늘 살펴본다. 그러하다 보면 그 이면에 있는 이치가 와 닿을 때가 있다. 그것이 다 지혜가 된다. 그러하다 보면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아니하여서 이 현상의 모든 것이 둘 다에 뜻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하게 이야기를 끌어온 참 이유는 주관과 객관을 버리자는 이야기다. 기실은 그 주관과 객관이라는 신념에 중간에 버티고 서있는 “나”를 버리자는 이야기다. “개아”만 사라지면 주관과 객관은 훌륭한 쓰임이 된다. 허나 개아가 있는 주관과 객관은 시시비비의 도구가 된다. 헌데 너무 오랜 세월을 “개아가 나다”라고 살아온 우리는 개아를 먼저 없애기가 용이하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주관과 객관을 먼저 끊는 것을 방편으로 삼는다. 주객이 다 사라지면 삼매에 든다. 삼매란 본성이 드러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 삼매에 오래 들다보면 그 길이 상락아정(常樂我淨)<여기에서의 '아'는 궁극의 실체를 가르키기 위해 관습적인 언어로 표현하였음. 초기원음경전에도 해탈하신 분께서 '나'라는 용어를 쓰시는 것은 집착없이 관습적인 언어로 사용하였다는 말씀이 계심>임을 스스로 알고는 개아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다음에 계속....)

 

 

*토씨와 띄어쓰기를 다소 수정함, <>안은 옮긴이의 해설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