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의식과 무의식의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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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과 무의식
(그림)
의식(불교에서는 제6식)이 있다. 잠재의식(불교에서는 제7식인 말라식)이 있다. 무의식(불교에서는 제8식인 아뢰야식)이 있다. 여기서는 의식과 무의식을 이야기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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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이라는 것은 현대용어를 차용한 것이다. 즉 아뢰야식을 무의식으로 쓰는 것일 뿐임을 밝혀둔다. 즉 프로이드 등이 연구했던 그러한 “무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나중에 뒤에서 반야심경을 해석할 때 “무의식”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그것은 의식과 무의식이 모두 사라진 말 그대로의 무심상태이며 그 무의식은 지금 쓰는 무의식(아뢰야식)과는 다른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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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마음)이란 의식과 무의식의 통칭이다. 허나 우리는 흔히 의식만을 생각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그림에서 보듯이 의식과 무의식은 단절되어있다. 의식으로서 무의식을 들여다 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심리학자인 프로이드 등은 무의식을 알고자 하여서 무의식의 표현인 꿈을 연구하기도 하였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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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 낮, 꿈(또는 잠꼬대), 깊은 잠 의 세 가지 상태에서 서로 단절이 되어있다. 누군가는 잠이 들은 “꿈속”에서도 깨어있고 누군가는 꿈 없는 “깊은 잠” 속에서도 깨어있다. 이러한 것은 본성이 드러나면서 세 가지 상태가 연결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의식으로서는 세 가지 상태에서 단절이 아니 될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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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과 무의식의 특성을 한번 알아보자.
의식은 분별지(分別智) 이다. 무의식은 직관지(直觀智) 이다. 본성은 지혜지(智慧智) 또는 깨어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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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은 영상으로 찍는다. 의식은 그 영상 위에다가 분별을 하여 주객으로 이러저러하게 분석을 한다. 예로서 경치를 볼 때에 무의식은 그 경치를 사진으로 찍어서 저장하며 의식은 그 경치가 아름답다 어떠하다 하며 분석을 하여서 그 그림위에다가 써놓는 것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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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여 본성을 지혜지 또는 순수각성, 순수의식이라고 하니까, 아! 저것도 의식이 확장된 어떤 것인가 보다 하고 여길 수도 있다. 하나 그러하지 아니한 이유가 만약 생각으로 따져본다면, 순수의식이란 아무 생각이 없는 상태이다. 즉 무심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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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무심이라고 혼절이나 죽음이 아니며 모든 생각이 사라진 그 상태에 묘심(깨어있음)이 있다. 이것을 한번 다음과 같이 표현해보겠다. 생각의 기본단위는 정보다. 정보의 최소단위는 찧고 빻고 혹은 주관과 객관이다. 한 생각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면 하나인 것 같지만 이미 한 생각이란 것 자체가 두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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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컴퓨터가 0 과 1 이라는 이진법이 최소 단위인 것과 같다. 순수의식이란 0 과 1의 두개가 사라진 것이다. 생각이 사라져본 체험이 없다면 한 생각이 남아있을 때가 마치 생각이 애초에 비롯된 제일 처음으로 여기겠지만 사실은 그 한 생각(두개의 정보)이 사라지면 그 한 생각이 비롯되기 전, 즉 애초의 순수의식이 드러난다. 자세한 내용은 책 말미의 삼매에서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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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 : 응용프로그램, 비인과(非因果), 비운명(非運命)
무의식: 기본프로그램, 인과(因果), 운명(運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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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식으로 한번 설명해본다. 컴퓨터를 만들 때 1+1=2, 2+3=5처럼 딱딱 맞아 떨어져야만 프로그램을 만들 수가 있다. 만약 1+1=2 도 됐다가 1+1=9 도 된다면 애초부터 프로그램을 짤 수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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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무의식은 기본프로그램이다. 불교에서 무의식(아뢰야식)은 저장식이라고 한다. 또는 함장식이라고도 하며 경향성이 저장되어있다고도 한다. 이러한 무의식은 곧이곧대로 저장하게 되어있는 것이다. 이제 딱딱 맞아 떨어지게끔 기본프로그램을 만들었다면 그 위에다가 온라인게임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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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용을 하여서 무엇을 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온라인게임에서는 선택을 자유의지로 마음대로 한다. 물론 아무리 선택이 마음대로지만은, 선택하는 이의 경향성(傾向性 또는 패턴 Pattern)은 대체적으로 선호(選好)하는 쪽으로만 선택을 하게 된다. 허나 어느 날 경향성을 바꾸어서 다른 선택을 할 수가 있다면 게임의 양상은 확 바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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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은 인과 프로그램이다. 원인과 결과가 딱 맞는다는 이야기다. 악한 일을 하였는데 선하게 보상 받는다면 일단 불공평하다고 여길 것이다. 허나 불공평을 넘어서서, 만약 이러하게 된다면 세상은 애초부터 존재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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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기본프로그램이 존재 하려면 인과가 딱 맞아야만 가능해지는 기본조건을 이야기 한 것과 같다. 헌데 의식은 비인과라고 하였으니 이 또한 무슨 말인가? 중론에서 용수보살은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한다.
“흙이라는 원인이 어떤 결과가 될 것인지를 알 수 있는가?”
물론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결과를 보고는 원인을 알 수 있는 경우이다.
즉 집을 보았을 때 “아! 이집은 흙으로 지어졌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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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집의 원인이 흙이었음을 결과를 먼저 알고는 알게 된다. 도자기라는 결과물을 먼저 보고나서야 그것이 흙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게 된다. 즉 흙이 도공이라는 인연을 만나면 도자기라는 결과가 되는 것이요. 흙이 건축가라는 인연을 만나면 집이라는 결과가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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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들은 이야기인데, 예전의 과학은 원인을 알면 필경 결과를 알 수 있다고 이야기 했다면 요사이는 원인을 알아도 결과를 알 수가 없다고도 이야기 한다고 한다.
즉 원인으로 결과를 알 수가 없으며 오히려 결과를 보서나서야 원인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성립된다. 또한 원인에 인연이 작용하여서 그 결과물이 다르게 될 수 있다는 이야기도 성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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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하면은 무의식은 인과적이요, 의식은 자유의지의 선택에 따라서, 즉 인연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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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은 운명론(運命論)적이다. 사주팔자는 대체로 맞는 것이다. 이유는 선악 업이 무의식이라는 칩(컴퓨터로 비유하여 본다면)에 저장되어있으며 그러한 경향성은 쉬이 바뀌지가 아니하기 때문에 그대로 인과응보를 받고 또한 보상을 받으며 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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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운명론이 틀리는 것이라면 애초부터 이 현상이 존재할 수도 없거니와 또한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마음공부는 할 필요도 없게 될 것이다. 윤회를 믿는 이라면 마음공부 하여서 공부되었다고 하더라도 다음 생에는 악마로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비윤회쪽 종교인이라면 이미 신의 나라에 갈수 있는 사람은 선행과 상관없이 정해져 있다는 이야기가 성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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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을 닦지 아니 하여도 다음 생에는 훌륭한 사람으로 태어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성립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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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은 비운명론(非運命論) 적이다. 의식이 자유의지로 경향성을 바꾸거나 소멸시키면 운명도 바뀌는 것이다. 운명이 바뀌지 아니한다면 우리가 지금 마음공부를 할 의미도 없는 것이다. 애초에 마음공부가 될 분은 그러하게 왔을 것이요. 애초부터 삿되게 될 이는 그러하게 와서, 더 이상은 아무것도 바뀌지 아니할 터인데 무슨 공부를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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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붓다는 외도(外道)가 물어올 때에 운명도 아니요 비운명도 아니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운명과 비운명은 무의식과 의식으로서 현상(이세상과 저세상의 통칭)에만 존재할 뿐이다. 즉 색(色)에 한정된 이야기이며 이 세상의 바탕인 본성으로 이야기 한다면 그 둘을 다 떠나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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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붓다는 운명 비운명 뿐만이 아니고 운명과 비운명이 둘 다 맞느냐는 질문에도 아니라고 하셨고 나아가 운명과 비운명이 둘 다가 틀리냐는 질문에도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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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나 비운명 하나가 맞느냐는 질문은 당연히 잘못된 것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현상은 둘 다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허면 운명 비운명 둘 다 맞느냐는 질문에 아니라고 한 이유는 그 둘이 현상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본래마음엔 원인도 결과도 없다. 그러므로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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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면 운명 비운명 둘 다가 틀리냐는 질문도 아니라고 한 이유는 그 둘을 떠난 상태가 본래마음이긴 하지만 그것 역시 반쪽짜리이기 때문이다. 이유가 나중에 색즉시공 한 후에 공즉시색이 되면, 이 현상 즉 색(色)자체가 본래마음이기 때문이다(中道에 대한 이야기다).-
<본 [삼매]는 2006년경 순일큰스님께서 초기원음경전(빠알리어 오부 니까야)을 뵙기 전에 저술하신 책으로 경전을 보신 다음에는 이 책에 나오는 '반야심경'의 내용이 부처님의 원음경전 본래 가르침과 다르다고 말씀하셨다. 단적으로 초기경전에는 '색즉시공'의 색(오온,색수상행식)이 모두 소멸하여야 공(반야, 궁극, 불성, 깨어있음, 열반)이 드러난다고 하셨다. 즉, 색(오온)이 공(반야)이라는 것은 단지 사유에 의거한 쪼가리 견해일 뿐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책 말미의 반야심경에서 다시 한번 이야기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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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간 일단 요약하여 본다면 위의 네 가지 질문에 대한 모든 생각이 끊어졌을 때에 본성(本性)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또한 앞의 운명론이 맞는다고 한다면 이제 아무도 본성으로 향하지 아니할 것이요. 마찬가지로 비운명론이 맞는다고 하여도 위와 같기 때문이다.
*토씨와 띄어쓰기를 다소 수정함. <>안은 옮긴이의 설명임.
의식과 무의식에 대한 것은 우리가 잘 알듯이 근대에 들어와 서양의 프로이드에 의한 학설인데 부처님께서는 2500년 전에 이미 다 세상과 나, 마음들(法)을 낱낱이 밝혀 놓으셨다. 근래에 서양에서 부처님의 초기경전말씀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일반인들의 통속적인 생각으로는 부처님을 1)탐진치를 소멸하신 '청정한 인간'으로 알고 있는데 순일큰스님께서는 초기경전 [디가니까야-사문과 경]에 나오듯 그것은 낮은 단계로 부처님을 바르게 본 것이고 2)육신통이 갖추시고 실지실견, 전지전능하신 분으로 보는 것이 석가모니 부처님을 높은 단계의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는 것이라 강조하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 못하는 이유는 삼매의 경지를 모르기 때문이라 하신다. 초기경전에도 '삼매와 부처님의 경지'를 사유하여 알려고 하면 미치게 된다는 말씀이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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