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일선원/순일스님저서

삼매(三昧) - 제3장 기독교와 불교의 여정-1

순일자재 2013. 1. 18.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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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기독교와 불교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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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불교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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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 하나님: 아담 -(자유의지) - 선악과(善惡果) - 원죄(原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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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 무아<비아-오온은 실체가 아님> : 생각(몸) -의지적 힘 - 선악업(善惡業) - 고(苦, 괴로움), 번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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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물론 생각 전에 무명(無明)에 의하여 행(行)이 생기고.......등의 앞선 이야기<12연기-집성제>가 별도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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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식으로 본다면 하나님께서 흙덩이인 아담을 빚으셨다. 그리고는 숨(자유의지, 생각)을 불어 넣어주셨다. 이미 숨을 불어 넣어주신 것이 자유의지(自由意志)를 주신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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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에덴동산에서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하셨다. 다만 선악과만은 따먹지 말라고 하셨다. 즉 에덴동산은 천국과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허나 사탄이 뱀으로 변하여서 이브를 꼬였다.

“저거 먹으면 하나님처럼 되니까 먹지 말라고 하신거야”

그 꼬임에 선악과(善惡果)를 먹게 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다. 그때부터 원죄(原罪)가 생긴 것이다. 누군가 물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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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하나님께서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므로 이미 선악과를 따 먹을걸 아셨을 터인데 저러하게 선악과를 만드셨으니 안 좋은 하나님이다.

2.따 먹을걸 미리 몰랐다면 전지전능하지 아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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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셨을 때 하나님과 같은 모습으로 만드셨다고 한다. 그 모습이란 겉모양일 수도 있겠지만 마음을 이야기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나님이 흙덩이에 숨을 불어 넣어주실 때에는 이미 당신처럼 만들고 싶으셨을 것이고 움직이기를 바라셨을 것이다.

움직이지 아니하는 흙덩이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움직인다는 것은 정보이다. 정보는 생각의 기본단위이다. 무엇이 되었건 움직이는 것은 생각이 있는 것이다. 생각은 자유의지이다. 이미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것 자체가 자유의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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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을 것도 아셨으리라 추측이 된다. 허나 어쩔 수가 없으셨던 것은 아닐까? 움직여야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담이 그것만은 자유의지로 따먹지 아니하길 바라셨고, 하는 수 없이 따 먹었을 때에도 이제 자유의지로 선악을 알아 버렸으니 그 원죄의 고통을 받아보고는 다시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선택하여서 돌아오라는 말씀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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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탕아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자유의지로 “선악 법”을 택하면 금수보다 못 할 수도 있으며 다시 그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택하면 이제 신성에 들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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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적으로 이야기 해보겠다. [붓다의 옛길]이라는 책에 보면 제자가 붓다에게 업(業)이란 무엇이냐고 묻는다.

“업이란 의지적 힘이다”라고 붓다가 답하신다. 의지적 힘이란 자유의지와 같은 것이다.
모든 의지를 내서 행하는 것 즉 유위(有爲)행은 모두 “업”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성현은 모두 무위(無爲)로 법을 삼는다는 금강경 내용과 배치되는 것이 유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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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의지를 내는 것은 “개아(個我)” 라는 이야기다. 개아가 사라진 이는 즉 무아(無我)<비아-몸과 마음은 실체가 아니다. 즉, 몸과 마음에 집착하지 않음>인 이는 함이 없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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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자 없는 행위라는 이야기이며 “흐름에든 자”라는 이야기 일 것이다. 위의 “의지적 힘이 업이다”라는 말은 애초에 무지(무지, 무명無明)에 의하여 개아가 형성된 과정<몸과 마음, 오온을 나의 것, 나, 나의 실체로 여김>과 연관되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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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개아가 자유의지를 부리면 업이라는 이야기다. 개아가 사라지면 즉 무위의 행이 되면, 행위자 없는 행위가 되면 업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개아가 행위의 주체가 아니며 온전히 하나님이 행사하는 행위가 되면 업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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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불성이 행하는 행위가 되면 업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자유의지(自由意志)라는 단어 자체가 그러하다. 전체자가 행하는 뜻인 것이다.
“스스로 말미암은 이” 즉 원인도 결과도 없이 “전체인 이”가 된다.
개아가 행사하는 의지적 행위는 모두 선악 법에 기초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는 한 괴로움을 만들 수밖에 없다. 그것이 또한 번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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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또한 업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셨다.

생각 업 - 1.의업(意業)- 탐(貪),진(嗔),치(癡)

생각한 후에 짓는 업 - 2.신업(身業) 3.구업(口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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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다. 붓다는 생각자체가 “업”이라고 규정하신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 하였듯이 개아가 하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즉 위에서 보듯이 개아=생각업=탐진치 이다. 탐진치로 짓는 생각은 모두 업(業)이라는 이야기가 성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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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불교에서는 선업(善業)도 업이라고 이야기 한다. 이유는 앞서서 이야기 하였듯이 “조건 있는 선”이란 늘 언제든지 악으로 오락가락할 수 있는 선이기 때문이다. 또는 “조건 있는 선”이란 위에서 보듯이 무언가 탐을 바라고(보상을 바라고) 행동한 선(善)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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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일단은 악에서 선으로 먼저 가야한다. 그래야 악도 선도 떠나서 지선(至善)이 될 수가 있다. 악한 이가 선악을 모두 버리고 지선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한 듯 하나 그러하기가 불가(不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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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종교 어느 마음공부를 막론하고 대다수가 탐진치와 두려움에 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탐진치를 흔히 불교의 전유물로 보는 이유는 단지 붓다가 탐진치를 강조 하시고 또한 탐진치로부터 벗어남이 해탈이라고 짤막하면서도 강한 메시지를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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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종교와 마음공부의 위대한 분들로부터의 이러한 말씀 덕분으로 우리 인류는 현재 치(어리석음, 교만, 자만, 아만 등등)를 하든 안하든 그것은 번뇌를 쌓으므로 나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성냄)을 하 든 안하든, 그것은 갈등을 쌓게 하며 나쁜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으며, 그것을 아니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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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현주소 이다. 탐이 번뇌를 쌓게 하는 것인지를 대다수의 우리가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은, 아마도 아직 숙제인 듯하다. 신에게 순복하거나, 또는 마음공부로 참나가 되고자 하는 이들 중 어떠한 소수는 지금 갖고 있는 탐을 (또는 진과 치마저도) 다 남겨 놓고서도, 천국에 가거나 또는 참나가 되고자 하는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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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서 그것을 다 빼어내라고 모든 종교가 이야기 한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남겨놓고서도 참나가 될 수 있는 길은, 아마도 있지 아니할 듯 하다. 깨달으려고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스스로 물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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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사해탈

2. 온전한 평화
아마도 위의 대부분 포함될 것이다. 온전한 평화란 참 행복을 이야기 하는 것이기도 하다. 번뇌가 사라지면 온전한 평화일 것이다. 이것에 찬성하지 아니 하는 분들도 있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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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온전한”이란 말이 의미하듯이 상대적 행복이 아니고 절대적 행복은 번뇌의 소멸이 아닐까? 즉 재물이 되었건 명예가 되었건, 번뇌가 있다면 그것은 온전한 평화가 아닐 것이다. 허나 마음에 번뇌가 하나도 없다면 그것은 온전한 평화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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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하다면 우리는 번뇌의 “원인”만 알면 이제 번뇌를 없앨 수 있다. 번뇌의 원인이 무엇일까? 탐진치와 생노병사를 떠나서 번뇌의 원인이 따로 있을 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자. 아마도 다른 번뇌의 원인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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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탐진치가 번뇌의 원인이었으며, 그러한 탐진치를 부리는 것이 바로 “개아”인 것이다. 즉 번뇌의 제1원인은 “개아”이고 제2원인은 “탐진치”인 것이다. 이것을 떠나서 번뇌라고는 있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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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진치를 마음에서 빼어내고 개아마저 다 빼어내면 그러므로 저절로 온전한 평화가 될뿐더러 생사해탈까지 이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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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진치 거의 빼어냈을 때 마지막까지 남는 것이 전체가 되고자 하는 탐심이다. 또는 개아의 이럴까 저럴까 하는 모습이 자나 깨나 24시간 동안 조견<큰스님께서 무심삼매가 깊어시지며 꿈과 잠에서 깨어있음을 체험하심>이 된다. 미세한 그 모습마저 커다란 번뇌로 다가 오기 때문에 마지막에 결국 개아를 소멸하는 길로 나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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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할 때 “전체”가 된다. 자나 깨나 “전체”가 된다. 그러하므로 생사해탈이 동시적으로 되게 된다. 누군가가 번뇌의 원인인 “개아, 탐진치”를 남겨 놓고서 2차적인 수행방법으로 번뇌를 사라지게 한다면 그것은 일정분 효과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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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계속 번뇌를 짓고 쌓으면서 없애는 악순환이 될 것이다. 일심이나 무심공부를 먼저 하여도 잘 아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거에 탐진치로 인하여 쌓여진 번뇌를 먼저 참회건 다른 무슨 방법으로 일단 씻어내고, 이제부터 탐진치 아니하며 2차적인 수행방법으로 닦아 나가야 온전한 평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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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탐진치를 마음에서 빼어내 간다면 2차적인 수행방법이 의미가 없어진다. 저절로 일심 무심 등등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몸과 마음이 나가 아니다<비아>”라는 길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별도의 수행이 필요 없이 마음에서 저절로 번뇌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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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어려울 때 탐진치를 잘 다스리고 종래에 마음에서 빼어내어 간다면 시간이 필요할 뿐 저절로 번뇌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개아”가 “나”가 아니라고만 하면 “본래 나<반야, 본래 나라는 것은 초기경전에 는 아따(atta-자아,궁극,실체)로 표현되어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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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나 마하리쉬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였다고 들었다. 즉 “참나”가 아니라는 착각만 벗으면 된다..........고 이야기 하였다고 한다. 전자는 무아<비아> 쪽에 치중한 이야기요. 후자는 참나<atta>* 쪽에 치중한 이야기가 되는 듯한 뉘앙스이다. 다 같은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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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데 혹여 소수의 우리들은 “이야, 무척 쉽구나! 수행 필요 없이 저러하게 착각만 벗으면 되는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하다. 쉽다면 무척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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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마하리쉬 이야기는 그리 간단한 이야기가 아닐 듯싶다. 참나가 아니라는 착각을 벗기 위하여 탐진치를 빼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마하리쉬가 “에고의 완전한 소멸”을 이야기 하였다고 들었다. 그것은 바로 탐진치의 소멸과 또한 무아<비아>를 이야기 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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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탐진치를 빼어내는 노력 없이 “착각만 벗으면 돼, 착각만 벗으면 돼!” 한다면 그러한 노력은 아무리 긴 시간을 지난다 하더라도 별 의미가 없게 될 것이다. 허나 탐진치를 빼어내면서 “착각만 벗으면 돼” 한다면 그러한 공부는 긴 시간을 요하지 아니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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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누군가 착각이 아니고 진지하게 “몸과 마음이 나가 아니다”라고 여긴다면 그는 즉각적으로 탐진치를 놓아 버리게 된다. 이러한 경우는 예외이다.

 

 

 

부자되세요

 

토씨와 띄어쓰기를 다소 수정하였으며 <>안은 옮긴이의 설명임.

*무아(無我)와 비아(非我), atta와 anatta에 대한 논쟁은 초기경전 연구자 및 수행자들의 가장 커다란 논쟁거리 중의 하나이다. 옮긴이의 견해를 간략히 밝히면 초기경전에 사용된 anatta라는 용어는 an(非)+atta(我)로 해석이 자연스러우며 이해에 전혀 무리가 없다.

특히 경전에 반복되는 문구로 '이것(오온, 형성된 것)은 항상하는가, 항상하지 않는가(非常)? 항상하지 않는 것은 즐거움인가, 괴로움인가?(苦) 괴로운 것은 atta 인가, anatta 인가(非我)?의 삼특상(비상,고,비아) 말씀이 무상,고,무아로 잘못이해되고 있다고 본다.   

다만, 부처님께서는 힌두교나 타 종교에서 말하는 영혼불멸의 존재로서의 '자아(atman)'가 아니라 오온을 모두 완전히 소멸한 상태(열반)의 궁극의 실체를 관습적인 표현으로 집착없이 자아(atta)라는 용어로 사용하셨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