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기독교의 여정
기독교의
여정은 아래와 비슷할 듯 하다.
(그림)
1.
회개
2.
너희들 중 죄짓지 아니한 자, 저 여인을 돌로 쳐라
3.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
4.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5.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내밀어라
6.
원수를 사랑하라
“수고로이
짐을 진 자들이여, 모두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니.......”
에고에
의하여 만들어진 번뇌는 참으로 무거운 짐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수고로이 짐 진”이라 하셨을 것이다.
1.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이
말씀에는 두 가지 뜻이 있을 듯싶다.
1)천국이
가까웠으니 얼른들 회개하여야 한다.
2)회개하면
우리의 마음이 천국에 가까워진다. 즉 수고로운 짐이 덜어진다.
2.
너희들 중 죄짓지 아니한 자 저 여인을 돌로 쳐라...
예수를
비방하는 바리새인들이 창녀인 사마리안 여인을 예수 앞에 데려 왔다고 들었다.
예수가
십계명대로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라고 한다면, 살인을 교사했다고 비방되어질 것이요, 살려주라고
한다면 십계명을 예수 스스로 어겼다고 하여 곤란한 입장에 처할 상황이었다.
즉, 이리하여도 저리하여도 곤란한 지경에 처하실 위기였다.
그때
예수가 무언가를 땅에 쓰셨다고 한다. 무엇을 쓰셨는지는 성경에도 아니 나왔다고 들었다. 그리곤
곧바로 일어나서 “너희들 중 죄짓지 아니한 자, 저 여인을 돌로 쳐라”고 하셨다.
자식을
소중히 사랑하는 많은 부모들은 자식이 사회적으로 잘못된 일을 하였을 때마저도 차마 “죄”라는 말을 입에 담을 수가 없어서 종종 편지를 쓰기도
한다. 바리새인들
입장에서는 예수가 적으로 보였을망정, 원수가 없는 예수 입장에선 바리새인들도 소중한 자식과 같지 않았을까?
차마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죄”라는 말을 입에 담을 수가 없으셨기에 땅에다 글로 쓰지 아니 하였을까? 그러나 글로 써서만은 알아듣지 못하기에 하는 수
없이 일어나서 말로서 하신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하여 본다.
3.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
“조건
있는 선”은 번뇌로 저장이 된다. 스스로의 마음을 속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혹여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으면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지지는 아니할까?
아버지
하나님! 처음에 저는 천국을 가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허나 이제 온전히 하나님께서 제 안에 거(居)하시고 저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축복뿐입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고 저에게 이러한 길을 보여주셔서 너무도 감사합니다. 만약
천국에 저의 자리가 있다면, 이제 저 대신 다른 이를 그곳에 보내주소서.
4.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아끼라(사랑하라)...
이웃을
내 몸과 같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비유가 아닌 “똑같이, 하나로서, 이꼬르=” 라는 이야기일 듯 싶다.
붓다의 말씀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아무리
세상을 둘러보아도 나만큼 사랑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남들도 그와 같이 스스로를 사랑한다. 허니 우리가 우리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고 사랑받으려면
남들도 그와 같으니 그들에게도 그와 같이 사랑을 주어야 하지 않는가?”
5.왼뺨을
맞으면 오른뺨마저 내밀라.
참으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아끼고 사랑한다면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내밀 수 있을 듯 싶다. 그러나 그러하지 못할 때 참으로 이웃을 “나”처럼
여기는지 한번 의심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러한
경지의 사랑은 에고(개아)를 벗어나고 있는 중인 것이다. 동물은
물론 사람이라도 위와 같이 할 수 있는 경우는 오로지 상대를 너무도 사랑할 때 뿐이다. “조건 없는 사랑”일 때 뿐이다. 우리가 흔히 “희생” 또는
“순복”이라고 부르는 단어일 때 뿐이다. 허나 “희생”이라는 단어는 옆에서 그러한 상황을 지켜본 사람이 쓰는 “단어”일 뿐이다. 어머니가 극한
상황에서 자식을 위하여 생명을 던질 때에 스스로 “희생”이라고 여기지 아니 할 것이다.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조건 없는 사랑)에 생명까지도 다
내어 던질 수 있을 뿐인 것이지 희생이라고 여긴다면 목숨을 두려워하는 개아는 그리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순복도
그러하다.
6.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를
사람으로서 사랑할 수 있을까?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이러한 말씀을 하였다고 들었다.
“아버지
하나님, 이 잔을 제게서 돌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여 주소서. 그러나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어쩌면
너무도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셨다.
우리에게
마지막에 개아를 예수처럼 버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내 안에 거하시게 하는 모범을 보이셨을 것도 같다. 허나
곧 말씀하셨다.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이러하시고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박히셔서
십자가 아래에 자기를 못 박음질한 로마 병사들을 보며 말씀하신다.
“아버지
하나님, 저들은 저들이 한 짓을 모르나이다. 저들을 용서 하소서!”
저들은
저들이 한 짓을 모르나이다............
저들은
철이 없습니다..................
예수에게는
아무런 분노도 동요도 없었던 것이다.
“저들을
용서 하소서” 예수님은 이미 용서고 무엇이고도 없으셨다.
다만
아버지 하나님이 저들을 벌 하실 것이 두려워서 용서하라고 하신다.
참으로
“원수를 사랑” 하신 대목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로마병사들이 원수이다. 허나 예수에게는 원수자체가 없으셨던 것이다.
그
로마인들이 바로 예수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예수는 그들을 너무도 “사랑하신”것이다.
철없는
아이가 실수로 자기를 장애인이나 죽게까지 하였을 때 우리는 과연 담담할 수 있을까? 사랑하지 아니 하고는 힘이 들것이다.
위에서
어머니가 자식을 위하여 생명을 던지는 “조건 없는 사랑”을 이야기 하였다. 차이점은
그 어머니는 자식을 위하여서만 “조건 없는 사랑”이었다는 이야기며 예수는 모든 인류 나아가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조건 없는 사랑” 즉
“절대사랑”이었다는 것이다. 절대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사랑받는 대상이 있다면 불가한 일이다.
사실은
예수 자신이 “사랑 자체”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가
조건적으로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사랑하지 아니 하였다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사랑 자체였기
때문에 완전자였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사랑밖에는 없으셨을 것이며 그것을 우리가 이해하게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을 것이다.
“사랑 자체”이신
분은 어느 곳에 살고 있을까? 그분 계신 곳은 어디가 되었건 그곳이 천국일 것이다. 그분이 설사 지옥에 계셨다고 하더라도 바로 그 지옥이
그분에겐 천국이 될 것이다. 사랑 자체인 사람에게는 세상의 장소가 중요치 아니 하다. 그 자신이 이미 전체요 천국이요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또는
누군가 물어 보았을지도 모른다.
"예수시여,
어느 정도 되면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또는
“예수시여,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원수를
사랑할 정도면 사랑 자체이다. 사랑 자체이면 어느 곳이건 이미 천국이다. 즉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면 천국에 들 수 있다”고 말하셨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예수는
사랑 자체였기 때문에 “전체자”였기 때문에, 개아가 아니었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할 수 있었으며 우리에게 말로가 아니라 참으로 그리할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친히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죄를 사하여 주기 위하여 “대속”하신 것이 맞을 듯 하다.
우리도
예수를 쫓아 예수가 하신데 까지 즉 “원수를 사랑하라”의 경지가 된다면 마음속에 아무런 번뇌도, 죄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개아가
종종 사랑을 위하여 개아를 포기하는 경우를 우리는 본다.
어머니가
자식을 살리기 위하여 스스로 죽음을 맞는다든지 하는 경우이다. 허나
예수는 한사람 몇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서도 아니요. 인류 전체를 위하여 몸을 던졌고, 그것도 우리가 보기에 원수들에게 던져 주었다. 이것은
개아로서는 불가한 일이다.
그분은
“전체자”였던 것이다.
우리가
일원상의 여정을 회개로부터 시작하지 아니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또는
원수를 사랑하라.........등을 먼저 할 수 있을까?
아마도
힘이 들것이다.
위의
회개로부터 시작한다면 아마도 하나하나 벌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의
차에 따라서 시간의 차가 날 뿐일 것이다.
회개한
이는, “나 역시 그러하게 죄로 살아왔는데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로 자연히 옮겨간다.
그러나
“조건 있는 회개”는 진정한 회개가 아닐 것이다.
종종
어떤 이들은 일주일동안 번뇌가 쌓인 것을 털기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이 무서우시기도 하여서 조건 있는 회개를 하기도 한다.
엎드려서
두 손 모아 기도 한다고 하나님께서 그 마음 모르실리가 만무한 것이다.
우리들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고 기도한다.
어떤
이들은 이루어지며 어떤 이들은 아니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거하셔셔 모든 행사를 그분이 하시고 또한 그 결과도 하나님께 돌릴 수만 있다면 그 기도는 이루어질 것이다.
허나
빌 기는 하나님께 빌었으나, 모든 행사는 하나님께서 하시고 그 결과의 “과실”은 자기가 가지려하는 개아적 또는 이기적 마음이라면 그 기도는
이루어지기가 어려울 것이다.
(다음 장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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