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탐진치(貪嗔癡) 빼어버리는
것과 팔삼매(팔선정)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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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마음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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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 또는
본성(本性)이라고 하는 본래마음과 마음은 어떠한 관계인지 이야기 해본다. 본래마음-마음-몸 이러한
순서로 여기기도 하며, 본래마음이란 마음과 다른 별개의 무엇이라고 여기는 수가 왕왕이다. 본래마음과 마음은 같기도
하며 다르기도 하다.<초기경전에는 '본래마음'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은 없다(無記). 다만 형성된 것(오온, 나와 세상)은 모두 실체가 아니므로 실체를 소멸하라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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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마음을 떠나서,
또는 마음 없이는 본래마음이란 존재할 수가 없다. 본래마음이라는 것이 별도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마음에서 빼어낼 것을 다
빼어내면, 즉 탐진치를 다 빼어내면 그것이 본래마음이라는 것이다.<그러나 탐진치를 소멸한 것이 해탈, 열반이라고 하셨고 탐진치를 소멸한 것이 곧 무의도(무위)라고 하셨다.> 마음은 늘 두 가지를
오락가락한다. 그것이 주관과 객관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늘 두
가지로 구별된다. 대소(大小), 고저(高低), 장단(長短) 이 그것이다. 또한 마음도 사랑과 증오,
기뻐함과 싫어함, 행복과 고통.......처럼, 늘 두 가지로 오락가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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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세상은 모두가 늘
두 가지가 서로 의존하여서, 조건적으로 존재한다. 마음이 지은 것이 바로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락가락 하는 것,
즉 불변(不變)이 아니고, 늘 무상(無常)하여 변해갈 수밖에 없는 것은 모두 고통이다. 또는 '비교 자체'가 고통이다. 이러한 고통이란 또한 다른
말로 갈등이기도 하다. 고통과 갈등은 같은 것이며
바로 번뇌라는 이야기다. 마음과 세상은 모두
번뇌이다. 헌데 오락가락하지 아니하는
마음이 있다. 즉 사랑과 증오, 기뻐함과 싫어함, 행복과 고통, 또는 나와 남의 비교를 하지 아니하는 마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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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마음은 주관과
객관이 모두 사라진 본래마음이다. 마음에서 주관과 객관이
사라지면 마음은 오락가락하지 아니한다. 이러할 때 두개의
마음상태가 아닌, 오롯한 하나의 상태가 된다. 이것이 바로 무심이다.
무심이란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다. 빈병이란 병이 없는 것이
아니며, 그저 병이 비어있을 뿐이다. 그와 같이 무심이란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며, 오락가락하던 두개의 마음, 즉 갈등이 모두 사라진 마음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본래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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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첫 번째 무심인
텅빈삼매이다. 즉 오락가락하는 주관과
객관의 '분별 마음'은 움직이는 마음이요, 그것이 모두 고요해진 것이
바로 무심이다. 이러하게 처음에는 움직이는
마음에서 고요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 음료수를 손을 들어서
입으로 까지 가져가서는 마신다. 이것은 분별하는 마음이냐
아니냐를 이야기 해보자. 모든 움직임은 분별이다.
몸이 움직였다는 것은 이미 마음이 주관과 객관을 나누어 써서, 정보를 일으킨 것이다. 이것 역시 움직이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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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무심상태에서는
아무 움직임도 할 수 없으니 그냥 앉은 채로 죽어야 한다는 말인가? 커피를 무심히 마신다면
몸의 움직임은 마음의 움직임이었으므로 주관과 객관이 쓰여 졌으나 이것은 갈등이 없다. 허나 커피를 마시면서
“카페인이 들었으니 마시면 아니 좋을 텐데, 또는 많이 마시면 병 걸릴 터인데” 하고 생각 했다면 이것은 갈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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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둘은 같은 커피를
마시는 '행위'였으며, 둘 다 마음을 분별하여서 몸과 손을 움직였으나, 전자는 '나'가 없었기에 갈등이 없었으며 후자는 커피를 마시면 '나'의
몸에 아니 좋을 것 이라고 여기는 '나'가 있었기 때문에 갈등이 되었다. 다른 말로 설명을
한다면 전자는 '한생각'만이
있었다. 허나 후자는
'한생각'에다가 다시 '한생각'을 더하였다. 즉 전자는 무심히 아무러한
생각 없이 그저 몸을 움직이는 분별생각만 하였다. 허나 후자는 그것에
더하여서 "몸에 아니 좋을 텐데“라는 시시비비가 더하여진 생각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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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는 행위자 없는
행위였으며 후자는 행위자 있는
행위였다. 그러므로 첫 번째 무심은
고요에서만이 무심이 되었으나 두 번째 무심은
움직임에서도 고요한 무심이 되었다. 두 번째 무심이 움직임에서도 고요가 된 것은 '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아'라는
이야기다. 전자는 한 생각만 있었다.
한 생각 자체도 두개의 정보이며 분별이다. 허나 무심에서 쓰는 '한 생각'은 번뇌가 아니다. 후자는 앞의 '한 생각'에
또 다른 시시비비의 '한 생각'을 내었다. 이것이 바로 번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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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라는 사람들은 한
생각도 없이 늘 무심상태에 있다. 그러다가 제자가 질문을 던져오면 생각을 한다. 생각하지 아니 한다면 질문을 분석할 수가 없다. 질문 내용도
모른다. 질문 내용에 답을 한다는
것은 이미 생각을 하였다는 것이 된다. 허나 그는 대답을 무심히
한다. 즉 대답하는 것은 한
생각이지만, 그 답이 틀렸는지 또는 그 대답에 대하여 상대가 어찌 여길 것인지 등등의 또 다른 번뇌 생각을 하지 아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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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우리는 답을 하건
무엇을 하건 또 다른 뒷 생각을 내게 된다. 듣는 중에 여러 가지 답안을 이미 준비하며 또는 답을 하는 중에도 끝없이 상대가 어찌 여길 것인지에
대하여도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번뇌이다. 즉 성자는 평소에
오락가락하는 생각이 없다. 완전한 무심이다. 허나 생각을 써야 할 때가 되면 스스로 쓴다. 이것은 번뇌가 아니다. 또한 생각할 때에 생각만
존재하듯이, 그 생각에 대하여 다시 단죄하는 제2의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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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무심이 아닌 이는, 평소에 스스로 원하지 아니 하는데도 불구하고 잡생각들이 오고간다. 이것이 번뇌이다. 또한 스스로 오고가는 생각들에 또 다른 생각을 내어서 찧고 빻고 한다. 요약하면 움직이는 마음에서 고요한 마음이 되고나서, 움직임에서도 '나'를 버리고 고요가 되는 여정이다. 즉 '움직이는 마음'에서 '고요한 마음'으로 가는 것이 색즉시공(色卽是空)의 '공'이요, 움직임에도 고요함에도 머무르지 아니하여 움직임에도 늘 고요한 것이 공즉시색(空卽是色)의 바로 '색'이다.
토씨와 띄어쓰기를 약간 수정함, <>안은 옮긴이의 해설임. 본 [삼매]는 순일스님께서 '초기원음(빠알리 니끼야)경전'을 만나기 전에 쓰신 글로 초기경전의 부처님 말씀과는 다소의 차이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