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율[戒律] religious precepts, commandments, discipline
대다수의 종교와 마음공부에는 “계율”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가 특정 종교의 계율을 모르더라도, 그 계율들을 대충 틀리지 아니하게 떠 올릴 수 있다. 대다수의 계율은 '선'하기 위한 또는 탐진치 하지 아니 하기 위한 보편적인 지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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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계율을 우리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적어보자.
1.거짓말을 하지 말자.
거짓말을 하면은 번뇌가 생길 것이다.
“나는 남으로부터 당하고 싶지 아니한데, 남에게 하면 죄의식 내지 죄책감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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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남으로부터 거짓말을 당하면 화가 나듯이, 나 역시 남에게 거짓말을 하게 되면 죄의식이 생기며, 이것이 바로 갈등이며, 번뇌인 것이다. 탐진치 중 대체로 “치”의 문제이기 쉽다. 그리고 “입”으로 짓는 죄를 짓지 아니하여 “선”으로 가자는 것이다.
2.살생을 하지 말자.
1번과 같은 이치로, 번뇌가 생길 것이다. 또한 탐진치 중 “진”의 문제이기도 하다. 또는 살생을 한 이유가 “탐”에 있는 경우도 왕왕이다. 그리고 “몸”으로 죄를 짓지 아니하여 “선”으로 가자는 것이다.
3.도둑질 하지 말자.
갈등이 생길 것이며, 이러한 갈등이 바로 번뇌이다. 또한 탐진치 중 “탐”의 문제이며, 탐 중에서도 “재물”의 문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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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몸”으로 죄를 짓지 아니하여 “선”으로 가자는 것이다.
4.간음하지 말자.
약속된 이성이 아닌, 다른 이성을 탐하였을 때, 갈등 즉 번뇌가 생길 것이다.
또한 탐 중에서도 “성욕”에 관한 “탐”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죄를 짓지 아니하고 “선”으로 가자는 것이다. 또한 “몸”으로 죄를 짓지 아니하고 “선”으로 가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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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식으로 “보편적으로 번뇌를 일으키게 되는 것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고서, 그것을 하지 아니하게 되는 “지침”을 만들어 보면 그것이 바로 “계율”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러한 계율들은 대다수가 “탐진치”의 내용 안에 속할 것이다. 또한 “신구의(身口意, 몸 입 마음)”로 짓는 것에 포함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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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마음이 바르면(선하면)은 몸으로 하는 행동도, 말씨도 바르게 된다. 그러할 때 갈등(번뇌)은 대부분 없게 된다. 허나 마음이 선하지 아니할 때, 계율을 잘 지킴으로써 “바른생각”이 되게끔 하는 것이다. 마음을 “선”하게 하는 데는 계율 외에도 “회개, 참회”가 있다.
그러므로 계율과 참회라는 것은 마음을 “선”하게 하는 것이며, 선하게 한다는 것은 마음속의 악마와 천사와의 싸움에서 “천사”가 이기기 시작했다는 말이 되며, 그러할 때 둘의 싸움인 갈등이 점점 옅어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며, 즉 번뇌가 사라지기 시작하여서 평화가 깃들기 시작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허나 “선”이라는 것이 “조건 있는 선”인한 여전히 “악”이란 것에 기대어 있게 된다. 이것을 뛰어 넘는 것은 “조건 없는 선”으로 가는 것이다. 그러할 때 온전한 평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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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여정은 악을 지나서 선으로 가서, 선도 지나서, 둘 다에 머무르지 아니하여 본디의 본성이 온전히 드러남을 말하는 것이다.
-이상 순일큰스님 저서 [삼매] '제3장 기독교와 불교의 여정'중에서
산스크리트어 pañca-śīla 재가(在家)의 신도가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계율.
(1) 불살생계(不殺生戒). 살아 있는 것을 죽이지 말라.
(2) 불투도계(不偸盜戒). 훔치지 말라.
(3) 불사음계(不邪婬戒). 음란한 짓을 하지 말라.
(4) 불망어계(不妄語戒). 거짓말하지 말라.
(5) 불음주계(不飮酒戒). 술 마시지 말라.
초기원음(빠알리)경전의 삼장 중에 율장(律藏 Vinaya Pitaka) : 승단(Sangha)을 위한 계율 규정.
계율(戒律)
출처: 문화콘텐츠닷컴 용어사전 (www.daum.net)
① 인간완성의 수행생활의 규칙. 일반적으로는 도덕적인 덕을 실현하기 위한 수행상의 규범을 말한다.
② 계(戒)와 율(律)과의 합병어(合倂語).
계(戒)라는 것은 규율을 지키려고 하는 자발적인 마음의 움 직임.
율(律)이라는 것은 타율적인 규범을 의미함.
계(戒)는 방비지악(防非止惡)의 의미, 율(律)은 승단(僧團)의 규율이라고도 해석된다.
불교교단(佛敎敎團)이 확립됨에 따라 교단의 질서 유지에는 규범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만들어진 다양한 규율조항이나, 위반시의 벌칙을 규정한 것이 율(律)임. 이것을 마음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지키려고 맹세한 것을 계(戒)라고 한다.
따라서, 계(戒)와 율(律)이라는 것은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함께 평행(平行)해서 교단의 질서유지에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계율』이라고 병용(倂用)했다. 계와 율은 원래 다른 뜻이었지만, 중국 불교에 있어서는 숙어가 되었고, 불도인의 수행의 원리·규범이 되었다.
③ 또한, 율은 경장에 대해서 금지개조(禁止箇條) 전체를 의미하고, 계(戒)는 율(律)속에서 하나 하나의 훈계를 의미하는 것도 있다.
④ 율장(律藏)을 말함. [다른 설명] 불교에 있어서 윤리적 실천규범이 되는 것은 계율(戒律)이다.
계율은 계(戒)와 율(律)의 합성어로서 그 의미가 각각 다르다. 계는 범어 ila를 번역한 말로 습관 또는 성향(性向)의 뜻이 있다. 따라서 계는 타율적 금지의 뜻보다는 선하고 훌륭한 도덕생활을 권장하고 그것을 다짐하는 자발적 결의라고 볼 수 있다. 계에는 재가중(在家衆)이 가지는 삼귀계(三歸戒)·오계(五戒)·팔관재계(八關齊戒), 출가중(出家衆)이 갖는 사미계(沙彌(尼)戒)·식차마니계(式叉摩尼戒). 비구계(比丘戒)와 재가·출가가 공동으로 지니는 보살계(菩薩戒)가 있다.
율은 범어 viana 역어(譯語)로 훈련 또는 제지(制止)의 뜻이 있다. 즉 출가 수행자들이 지켜야 할 규율이나 규칙은 금지 조항이니 만큼 그것을 범했을 때에는 벌칙이 따른다.
율에는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Pr timoksa)와 건도( 度:Khanda)가 있다. 전자는 개인 수도생활의 금제(禁制)이고, 후자는 승단 공동생활의 규칙과 이를 어겼을 때의 죄과(罪科)에 대한 벌칙규정이다.
불교의 계율은 다른 종교의 그것처럼 교조(敎祖)가 일괄 제정한 것은 아니다. 필요에 따라 수시로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것을 후세에 제자들이 집성한 것이다. 특히 출가수행자들에 대한 계와 승단생활의 규정인 율은 당시 인도사회의 습속(習俗)을 배경으로 한 것이므로 조목(條目) 자체가 절대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을 굳이 고집할 필요는 없다. 또 계율에는 없더라도 필요하면 새로운 장려와 규제를 할 수도 있다. 계율은 어디까지나 옳고 善한 삶을 위한 수단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계율을 무시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계율은 혼란과 무규준(無規準)의 인간사회에서 바른 삶을 사는 기준과 생활규범을 제시하고 있으므로 기본정신은 반드시 존중되어야 한다. 계율의 기본정신은 자비·복덕·청정·진실·지혜로 요약할 수 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살더라도 이 덕목을 실천하고 증장하는 삶은 지계생활(持戒生活)이다. 반대로 이를 훼손하는 것은 파계가 된다. 더 쉽게 말하면 할 것은 하고 하지 말 것은 안하는 것이 '지계'이다. 그러나 할 것을 하지 않고 안할 것을 하는 것은 아무리 계율을 잘 지킨다 해도 파계(破戒)가 될 뿐이다.
⑴ 계율의 의미
스님이 지켜야 할 행동규범·율법으로 곧, 몸[身: 행위]과 입[口: 말]과 뜻[意: 마음]에 의한 일체의 악을 방지하기 위하여 불교에 귀의한 사람이 지켜야 할 행위규범을 의미한다.
⑵ 계율의 정의
계율이란 계와 율의 복합어로서, 원래 산스크리트어에서는 계[Sila]와 율[Vinaya]을 별개의 뜻으로 사용하여 붙여서는 쓰지 않았으며, 우리나라·중국·일본 등에서만 합성어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는 계와 율이 동일한 뜻으로 표현되었고, 일상어로 사용할 때에도 완전히 구별지을 수 없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격히 살펴보면 계와 율은 다음과 같이 현격한 차이가 있다.
① 계 … 습관·습성·관행 등의 의미가 있으며, '좋은 습관'·'도덕적 행위'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이는 곧 인간의 몸과 마음을 조정하는 종교적·도덕적인 규범을 뜻한다. 따라서 윤리도덕이나 법률·의례 등도 여기에 포함되며, 규정된 조문뿐만 아니라 일체의 수양덕목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불교도이면 남녀나 출가·재가의 구별 없이 모두가 지켜야 할 행위규범인 것이다.
② 율 … 조복(調伏)의 의미로, 즉 훈련을 뜻하며, 모든 그릇됨을 여의고 이상적인 세 계로 선도해야 할 출가교단을 통제하는 규범을 말한다. 따라서 단체생활을 영위하는 출가자를 통어(通御)하는 규범으로서, 재가자들이나 일반사람들에게는 크게 관계되지 않는 것이다. 인도에서 불교교단이 형성되었을 때에는 정치권력으로부터 교단이 독립된 생활을 영위하였으므로 국왕을 비롯하여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교단은 자치적 통제가 강화되어야 하였으므로 불교규범으로서의 율이 제정된 것이다.
결국, '계'는 넓은 의미에서 볼 때 불교도덕이요, '율'은 출가자만을 위한 통제규칙으로 정의된다고 하겠다. 대부분의 종교에서 계를 설정하고 있으나 율을 내세우는 경우는 드물다. 이는 대부분의 종교가 전문적인 출가교단을 위한 조직보다는 신앙만을 우선하는 경우가 많은데 비해, 불교는 그 출발부터 출가자들의 신앙은 물론 철학자들을 학습시켜 전문지도자로서 그 인격을 고매하게 하여야 할 의무를 부여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계는 선정(禪定)·지혜와 함께 삼학(三學)의 하나로서, 번뇌의 원인이 되는 탐(貪)·진(瞋)·치(癡)의 삼독(三毒)을 제거하는 방법으로도 설명되고 있다.
⑶ 계율의 성립
율장(律藏)이 언제부터 성립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다른 불교경전의 성립과 마찬가지로 정확한 연대를 유추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율장의 성립연대는 부파분열 이후 즉, 불멸후 300년 이후(서기 150년경)로 보인다. 물론 율장의 내용은 다소 변형되고 증보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 가운데 가장 일찍 성립된 것은 B.C. 100년∼1년(불멸후 300∼400년)에 성립된 것으로 보이는 {사분율(四分律)}·{오분율(五分律)}이며, 다음으로 서기 1년∼100년에 성립된 것으로 보이는 {십송율(十誦律)}이고, 그 후 다시 서기 100년∼200년에 성립된 것으로 보이는 {승기율(僧祇律)}이고, 최후에 성립된 것이 서기 300∼400년에 성립된 것으로 보이는 {유부율(有部律)}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그리고 {파리율(巴利律)}은 {십송율(十誦律)}에 가까운 것으로 서기 100년 전후에 성립된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한역(漢譯) 율장의 번역연대를 살펴보면 {십송율}은 서기 404년, {사분율}은 412년, {승기율}은 416년, {오분율}은 524년 그리고 {유부율}은 703년경이다.
⑷ 계율의 분류
{사분율행사초(四分律行事 )}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① 계법(戒法) … 부처님께서 정한 법
② 계체(戒體) … 법을 짓는 주체가 있기 때문에 항상 비행을 막고 악을 그치는 것
③ 계행(戒行) … 계체를 낱낱이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
④ 계상(戒相) … 계행에 따른 여러 가지 차별상
가. 소승에 있어서의 계의 분류
㈎ 오계(五戒) … ㉮ 살생을 하지 말라. ㉯ 훔치지 말라. ㉰ 음행하지 말라. ㉱ 거짓말 하지 말라. ㉲ 술 마시지 말라.
㈏ 팔계(八戒 … ㉮ ∼ ㉲
㉳ 꽃다발 쓰거나 향 바르지 말라.
㉴ 노래하고 풍류에 휩싸이지 말며 일부러 가서 구경하지도 말라.
㉵ 높고 잘 꾸민 평상에 앉지 말라.
㈐ 십계(十戒) … ㉮ ∼ ㉵
㉶ 때 아닌 적에 먹지 말라.
㉷ 제 빛인 금이나 물들인 은이나 다른 보물을 갖지 말라.
㈑ 삼귀의계(三歸依戒) … 불교에 처음 귀의할 때 하는 의식으로, 곧 불(佛)·법(法)·승(僧)에 귀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 비구의 250계
㈓ 비구니의 348계
나. 대승에 있어서의 계의 분류
보살이 수행하는 육바라밀(六波羅密)의 하나가 되어 보다 적극적인 수행덕목으로 발전되었으며, 일체의 계를 삼취정계(三聚淨戒)로 구분하였다.
-생략-
⑺ 계율과 관계된 여러 가지 의식
① 포살[布薩: Uposatha] … [정주(淨住)]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매달 1일과 15일의 이틀동안 일정한 지역 내에 있는 불교도들이 한 곳에 모여 계율의 조목들을 함께 외우면서 그 하나 하나에 대해 범한 일이 없는가를 각자 반성하는 모임을 말한다. 만약 그동안 한 가지라도 계율을 어긴 사실이 있다면 대중 앞에서 고백하고 참회해야 하였다.
② 안거[安居, Var a] … 출가한 스님들이 한 곳에 모여 외출을 금하고 수행하는 제도. 남방불교에서는 여름 한차례만 안거를 행하는데, 북방불교에서는 여름 3개월동안 행하는 하안거[夏安居, 음력 4월16일∼7월15일]와 겨울 3개월 동안 행하는 동안거[冬安居, 음력 10월16일∼1월15일]가 있다. 'Var a'란 말은 원래 '우(雨)·우기(雨期)'라는 뜻으로, 옛 인도의 바라문교에서 안거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불교에서는 육군비구(六群比丘)들이 여름에 행각하다가 폭풍우를 만나고 초목과 벌레들을 살상하여 비난을 받았으므로 여름에 비가 올 때에는 외출을 금지하고 수행을 하게 한 것이 불교에 있어서 안거(安居)의 기원이다.
안거기간 동안은 한 곳에서만 수행하도록 되어 있으며, 몇 안거를 지냈느냐에 따라 스님의 수행력이 되기도 한다. 안거는 각 본산(本山)의 사찰별 행하며, 안거를 실시하는 사찰은 안거자 명단을 작성하고 안거중의 각 소임을 정한다. 안거 중에는 좌선(坐禪)·간경(看經) 등에 의하여 수행을 행하는 것이 관례이 지만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좌선 위주로 수행을 한다.
③ 자자[自恣] … 안거가 끝나는 맨 마지막 날 대중들이 한 자리에 모여 그 동안의 생활을 서로 지적하고 질의·반성하는 의식을 말한다.
이상 출처:[다음블로그 '극락정토로 가는길'] http://blog.daum.net/mjpark39/16892877
비법(非法)과 법(法) - 2010년 1월호 미내사에 실린 글
3년 전쯤 두 분이 초기경전을 선물하였습니다. 이 경전은 부처님께서 열반하신지 7개월 안에 해탈하신 제자 스님들이 결집한 경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완전한 말씀으로 여겨집니다. 그 중 ‘디가니까야(총 3권)’를 보았는데 부처님 원음(原音)의 말씀에 감동을 하여서 경전에서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는 해탈에 이르는 더도 덜도 아닌 완전한 보물지도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초기경전의 말씀을 미내사 회원님들과 공유할 수 있어서 참으로 기쁩니다.
다음은 초기경전의 부처님 말씀입니다.
'비구들이여, 비법과 해로운 것을 알아야 하고 법과 이로운 것을 알아야 한다. 비법과 해로운 것을 알고 법과 이로운 것을 안 뒤 법을 따라, 이로운 것을 따라 도를 닦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비법이고 해로운 것인가? 생명을 죽이는 것은 비법이고 해로운 것이다.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은 비법이고 해로운 것이다. 삿된 음행은 비법이고 해로운 것이다. 거짓말은 비법이고 해로운 것이다. 중상모략은 비법이고 해로운 것이다. 욕설은 비법이고 해로운 것이다. 잡담은 비법이고 해로운 것이다. 탐욕은 비법이고 해로운 것이다. 악의는 비법이고 해로운 것이다. 그릇된 견해는 비법이고 해로운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비법이고 해로운 것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법이고 이로운 것인가?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는 것은 법이고 이로운 것이다.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을 삼가는 것은 법이고 이로운 것이다. 삿된 음행을 삼가는 것은 법이고 이로운 것이다. 거짓말을 삼가는 것은 법이고 이로운 것이다. 중상모략을 삼가는 것은 법이고 이로운 것이다. 욕설을 삼가는 것은 법이고 이로운 것이다. 잡담을 삼가는 것은 법이고 이로운 것이다. 탐욕 없음은 법이고 이로운 것이다. 악의 없음은 법이고 이로운 것이다. 바른 견해는 법이고 이로운 것이다.
비구들이여, 비법과 해로운 것을 알아야 하고 법과 이로운 것을 알아야 한다. 비법과 해로운 것을 알고 법과 이로운 것을 안 뒤 법을 따라 이로운 것을 따라 도를 닦아야 한다, 라고 한 것은 이런 이유로 그렇게 말했다.' <앙굿따라니까야, 비법 경>
<비법 경>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비법 : 1.살생, 2.도둑질, 3.삿된 음행, 4.거짓말, 5.중상모략(이간질), 6.욕설, 7.잡담, 8.탐욕의 마음, 9.악의의 마음, 10.그릇된 견해
*법 : 1.非살생, 2.非도둑질, 3.非삿된 음행, 4.非거짓말, 5.非중상모략, 6.非욕설, 7.非잡담, 8. 非탐욕의 마음, 9.非악의의 마음, 10.바른 견해
<비법 경>에서 ‘비법’은 ‘십불선업(十不善業)’이며 ‘법’은 ‘십선업도(十善業道)’입니다.
여기서 ‘비법’을 먼저 말씀하시고 그 후에 ‘법’을 설하신 까닭은 중생세계에 ‘비법’이 만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법과 비법의 관계를 보면 서로 상호의존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어느 정도 길이의 끈이 하나 있습니다. 그 끈 하나만으로는 ‘길다 또는 짧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끈 옆에 또 하나의 다른 끈이 있을 때 비로서 ‘짧다 또는 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소(大小), 고저(高低) 등 모두 이와 같습니다. 이와 같이 ‘어떤 견해(見解)’가 있을 때 이 견해와 상호의존적인 ‘반대의 견해’를 모른다면 이 ‘어떤 견해’를 이해할 수는 없는 겁니다. 어떤 견해를 옳거나 틀렸다거나 할 때에는 이미 ‘반대의 견해’도 알고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견해 자체가 ‘쌍(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와 같이 중생세계는 모두 상호의존적인 쌍(雙)인 ‘A 와 非A’로 이루어져 있으며, 법과 비법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에는 비법으로 사는 사람들과 법으로 사는 사람들, 이렇게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더 이익이며 행복하며 평화로울 것인가는 자명합니다. 비법으로 사는 사람들은 향하일로(向下一路)인 악처(惡處, 악한 장소), 파멸처, 지옥으로 계속하여 윤회 할 것이며, 법으로 사는 사람들은 향상일로(向上一路)로서 선처(善處), 천상세계, 나아가 해탈을 기대 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위와 관련된 초기경전의 말씀입니다.
'비구들이여, 열 가지 법(비법)을 갖춘 자는 마치 누가 그를 데려다 놓은 것처럼 지옥에 떨어진다. 무엇인 열인가? 생명을 죽인다. 주지 않은 것을 가진다. 삿된 음행을 한다. 거짓말을 한다. 중상모략을 한다. 욕설을 한다. 잡담을 한다. 탐욕 한다. 악의로 차있다. 삿된 견해를 가진다. 보시도 없고 공물도 없고 헌공도 없다. 선행과 악행의 업들에 대해 열매도 없고 과보도 없다.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화생하는 중생도 없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실현하여 선언하는, 덕스럽고 바른 도를 구축한 사문 바라문들도 이 세상에는 없다, 라는 전도된 소견을 가진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열 가지 법(비법)을 갖춘 자는 마치 누가 그를 데려다 놓은 것처럼 지옥에 떨어진다. 비구들이여, 열 가지 법을 갖춘 자는 마치 누가 그를 데려다 놓은 것처럼 천상에 태어난다. 무엇이 열인가?
생명을 죽이는 것을 버리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을 버리고. 삿된 음행을 버리고. 거짓말을 버리고. 중상모략을 버리고. 욕설을 버리고. 잡담을 버리고. 탐욕하지 않는다. 악의의 마음이 없다. 바른 견해를 가진다. 보시도 있고 공물도 있고 헌공도 있다. 선행과 악행의 업들에 대한 열매도 있고 과보도 있다. 이 세상도 있고 저 세상도 있다. 어머니도 있고 아버지도 있다. 화생하는 중생도 있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실현하여 선언하는 덕스럽고 바른 도를 구족한 사문 바라문들도 이 세상에는 있다, 라고 전도 되지 않은 소견을 가진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열 가지 법을 갖춘 자는 마치 누가 데려다 놓은 것처럼 천상에 태어난다.'
<앙굿따라니까야, 지옥과 천상 경>
이와 같이 ‘천상과 지옥’이 있으며, 없다고 생각 하는 사람은 잘못된 삿된 견해를 가진 자라고 하십니다. 또 다른 경 말씀을 보겠습니다.
'만약에 괴로움을 두려워하고 또한 그대들이 괴로움을 싫어한다면 드러내놓고 하든지 몰래 하든지 악하고 불건전한 일을 하지 말라. 만약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하려고 하든지, 지금 하고 있다면 그대는 도망가려 애써도 그에 따른 괴로움을 벗어날 수 없으리.'
<우다나, 소년들의 경>
이와 같이 ‘악하고 불건전한 일(非法)’을 남이 알게 하던지 모르게 하던지, 또한 지금 하고 있던지 혹은 하려고 하고만 있던지, 이와 같은 경우에 괴로움으로부터 도망가려 아무리 애를 써도 도망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누구나 이익 되고, 행복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살기를 바랄 것입니다. 얼굴은 동시에 두 가지 표정을 지을 수 없으며, 평화로울 때는 평화로운 얼굴이, 괴로울 때는 괴로운 얼굴이 됩니다. 이와 같이 마음도 동시에 두 가지 마음이 존재 할 수 없으며, 평화로운 마음일 때에는 오직 평화로운 마음만이 있으며, 괴로운 마음일 때에는 괴로운 마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탐욕에 강요된 마음’은 ‘평화로운 마음’이 아닙니다. ‘화내는 마음’은 ‘평화로운 마음’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마음(교만, 자만, 아만)’은 ‘평화로운 마음’이 아닙니다. ‘거짓말하는 마음’은 ‘평화로운 마음’이 아닙니다. ‘중상모략하는 마음’은 ‘평화로운 마음’이 아닙니다. ‘욕설하는 마음’은 ‘평화로운 마음’이 아닙니다. ‘쓸데없는 잡담하는 마음’은 ‘평화로운 마음’이 아닙니다. ‘살생(폭력)하는 마음’은 ‘평화로운 마음’이 아닙니다. ‘도둑질 하는 마음’은 ‘평화로운 마음’이 아닙니다. ‘삿된 성생활을 하는 마음’은 ‘평화로운 마음’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비법을 행하는 마음’은 ‘괴로운 마음’이지, ‘평화로운 마음’이 아닙니다. 어떤 중생이 있어서 비법을 행하면서 평화롭기를 바라는 것은, 스스로 ‘괴로운 마음’을 만들면서 ‘평화로운 마음’이기를 바라는 것처럼, 이치에 맞지 않는 ‘그릇된 견해(삿된 견해)’입니다.
이와 관련된 초기경전의 부처님 말씀입니다.
'비구들이여, 스무 가지 법(비법)을 갖춘 자는 마치 누가 그를 데려다 놓은 것처럼 지옥에 떨어진다. 무엇이 스물인가? 그는 자기 스스로도 생명을 죽이고, 남에게도 생명을 죽이도록 가르친다. 주지 않은 것을 가지고, 남에게도 주지 않은 것을 가르친다. 삿된 음행을. 거짓말을. 중상모략을. 욕설을. 잡담을. 탐욕을. 악의를. 자기 스스로도 그릇된 견해를 가지고, 남에게도 그릇된 견해를 가지도록 가르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스무 가지 법을 갖춘 자는 마치 누가 그를 데려다 놓은 것처럼 지옥에 떨어진다. 비구들이여, 스무 가지 법을 갖춘 자는 마치 누가 데려다 놓은 것처럼 천상에 태어난다. 무엇이 스물인가? 그는 자기 스스로도 생명을 죽이는 것을 멀리 여의고, 남에게도 생명을 죽이는 것을 멀리 여의도록 격려한다.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을 멀리 여의고, 삿된 음행을, 거짓말을, 중상모략을, 욕설을, 잡담을, 탐욕을, 악의 없는 마음을, 자기 스스로도 바른 견해를 가지고, 남에게도 바른 견해를 가지도록 격려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스무 가지 법을 갖춘 자는 마치 누가 데려다 놓은 것처럼 천상에 태어난다.'
<앙굿따라니까야, 지옥과 천상 경>
자신도 ‘비법’을 행하면서 남에게도 ‘비법’을 가르치면 그 업(業)의 결과는 ‘지옥’이라고 하십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씀을 하신 까닭은 중생 세계가 ‘삿된 견해(비법)’에 그만큼 전도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어떤 사람은 탐욕은 탐욕을 하고 싶은 만큼 경험을 해야지만 탐욕이 없어진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삿된 견해는 마치 살생은 살생을 하고 싶은 만큼 경험을 해야지만 살생의 마음이 소멸하며, 도둑질은 도둑질을 하고 싶은 만큼 경험을 해야지만 도둑질이 없어진다고 가르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지옥과 천상 경’의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이와 같이 행위 하는 사람들이 갈 곳은 파멸처, 지옥입니다. 이와 같이 ‘그릇된 견해’가 욕계에 만연한 까닭은 욕계가 탐욕으로 이루어진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비유를 해보겠습니다. 여기 끈이 있으며, 그 끈을 매듭지어서 계속해서 묶습니다. 세월이 지나서 어느 날 끈을 매듭지어서 묶는 것이 더 이상 재미가 없어지면서, 묶는 걸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만두었다고 그 끈이 풀어진 것은 아닙니다. 매듭지어서 묶여진 끈이 번뇌롭다면 이제 스스로 다시 풀기 시작해야 합니다. 누군가는 10년간 매듭을 묶었으며, 누군가는 2년만 매듭을 묶었다면, 전자의 사람이 후자의 사람 보다 매듭을 푸는데 있어서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어떤 경험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 경험을 그만두고 싶을 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매듭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그 묶은 세월만큼 매듭을 풀기 위한 더 많은 정진(노력)이 필요하게 됩니다.
이러한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1. 탐욕은 탐욕을 함으로써 없어지지 않으며, 탐욕은 비탐욕(非貪慾, 탐욕을 삼가는 것)을 함으로써 만이 탐욕이 없어진다.
2. 성냄은 성냄으로써 없어지지 않으며, 성냄은 非성냄을 함으로써만이 성냄이 없어진다.
3. 어리석음은 어리석음을 함으로써 없어지지 않으며, 어리석음은 非어리석음을 함으로써만이 어리석음이 없어진다.
4. 거짓말은 거짓말을 함으로써 없어지지 않으며, 거짓말은 非거짓말을 함으로써만이 거짓말이 없어진다.
5. 중상모략은 중상모략을 함으로써 없어지지 않으며, 중상모략은 非중상모략을 함으로써만이 중상모략이 없어진다.
6. 욕설은 욕설을 함으로써 없어지지 않으며, 욕설은 非욕설을 함으로써만이 욕설이 없어진다.
7. 잡담은 잡담을 함으로써 없어지지 않으며, 잡담은 非잡담을 함으로써만이 잡담이 없어진다.
8. 살생은 살생을 함으로써 없어지지 않으며, 살생은 非살생을 함으로써 만이 살생이 없어진다.
9. 도둑질은 도둑질을 함으로써 없어지지 않으며, 도둑질은 非도둑질을 함으로써 만이 도둑질이 없어진다.
10. 삿된 음행은 삿된 음행을 함으로써 없어지지 않으며, 삿된 음행은 非삿된 음행을 함으로써 만이 삿된 음행이 없어진다. 고 하십니다.
이와 같이 비탐(非貪), 비진(非瞋), 비치(非痴), 非거짓말, 非중상모략, 非욕설, 非잡담, 非살생, 非도둑질, 非삿된 음행은 착한 법(법, 유익한 법)인데, 이러한 착한 법 역시 업(善業)입니다. 착한 법(法, 十善業道)을 지으면 결과로서 현생에서 행복한 삶이거나 내세에 행복한 삶이라는 ‘선업(善業)’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나쁜 법(非法, 十不善業)과 반대(대치)되는 ‘좋은 업’이지만, 해탈은 아닙니다. ‘착한 업’에는 여전히 조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미움’보다 ‘사랑’이 착한 업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사랑에는 ‘이기적 탐욕’이 왕왕 있습니다. 이와 같은 ‘조건이 있는 사랑’은 언제든지 다시 ‘미움’이 됩니다. 이와 같은 까닭에 일단 ‘비법’에서 ‘법’이 되고, 그 법도 ‘비법’과 상호의존적인 것을 알고, 법마저 버리라고 하십니다. 조건 없는 사랑(탐욕이 없는 사랑)이 ‘원수를 사랑하라’이며, 이것을 자비라고 부릅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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